박사과정이 끝났다.

다행히 졸업으로 끝났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직장에도 갈 수 있었다.

 

초등학생 그 어느 순간에 장래희망을 떠올리며 20년 뒤의 자기 모습을 그려 제출하라는 과제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 오히려 더 큰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이 순간이 오로지 내 손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이 순간이 당도하기까지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

 

죽도록 힘든 순간마다 스스로를 믿으라 말해준 오아시스의 노래들. (특히 Whatever)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깨달음을 준 헤드윅 그리고 니체.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 아직 있을 수 있다.

 

그 외 모든 과정에 걸쳐 도와주신 분들 하나하나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첫 번째 대상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정미 선생님.

 

그 누구보다 먼저 감사하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순간부터 32살 초여름이 오던 날까지, 나는 그 말을 꾹 참았다.

 

선생님께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주던 제자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돌아왔노라고.

그래서 20년을 연락 하나 않고 기다렸다.

 

박사 졸업이 확정되고, 취직에 성공한 날에 동창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선생님께 닿을 수 있었다.

 

이스탄불 어느 한 공원에 앉아서 한 참을 고민하다가

박사가 됐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문자를 남겼다.

선생님이 만나기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다행히 선생님인 흔쾌히 약속을 잡아주셨다.

 

선생님을 20년 만에 보던 날, 변함없이 웃어주던 그 얼굴에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감사하다는 말과 나의 인생사를 나눴다.

 


폭력이 당연하던 시절, 나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스로가 한심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실제로 나에게 그런 말들을 했었다.

하늘 같은 선생님이 우직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그런 말들을 쏟아내는데,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말들을 믿었다.

그래서 공부고 뭐고 그냥 학교에서는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며 최대한 잠을 잤다.

나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데, 교우 관계도 좋을리가 없었다.

 

6학년이 되고, 김정미 선생님은 달랐다.

과학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망상을 늘어놓는 나, 선생된 입장에서는 말도 안듣는데 끌고가기 쉽지 않다.

 

그런데 우연찮게 원소 기호를 외우고 다니던 날, 선생님이 산소의 원소 기호를 아는 사람 있냐고 물었다.

심장을 두근대며 O2라고 대답했다.

말하고는 ‘괜히 나댔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광희야, 과학에 재능있는데? 진짜 똑똑하다’

 

선생님의 대답은 회색으로만 보이던 나의 세상을 푸르게 바꿨다.

꿈을 가지게 만들었다.

 

바로 다음 선생님 질문은 더 놀라웠다.

 

(Ar 이라고 쓰며) ‘이 원소는 뭔지 알아??’

 

아니.. 고작 초등학생인 내가 알리가…

모른다고 대답하고 너무 분한 마음에 집 가서 검색해서 알았다.

아르곤.

평생 잊지 못하는 원소이다.

 

여하튼 이 일로 인생의 목표라는걸 갖게 되었다.

이걸로 큰 힘을 가진 연구원이 되리라, 그리고 그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리라.
(당시에 코딩이 좋아서 혼자 프로그래밍을 독학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침 일찍 등교했는데 칠판에 한 가득 반 학생들의 별명을 손수 다 써놓으셨다.

이 역시 잊지 못할 장면이다.

그 중 칠판 한 켠에 나름 큼직하게 써놓은 내 별명, ‘과학지존’.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고 웃기지만, 그 순간 다짐했다.

‘지존’이 됐다고 깨닫는 순간, 선생님 앞에 서서 감사하다고 말하리라.

 

정말 운이 좋게도 그 날은 2026년 초여름에 나에게로 와주었다.


 

이런 얘기들을 나누며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 했지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질질짜는 박사가 될 순 없어서 애써 참았다.

 

연신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일어설 때, 내 인생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저 내 인생이 변할거라는 기대로 가득찬 과거였지만,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 순간이 당도하기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박사와 직장.

그 과정에 함께 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가장 힘들었던 여름을 지나며,

새로운 시작이 오고 있는 이 인생의 초가을을 기대하며.

 

나를 강력히 지지해준 당신, 위로해준 오아시스, 사랑을 알려준 헤드윅, 그리고

꿈을 심어준 나의 은사님, 김정미 선생님께.

 

20년을 돌아 전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